그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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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솔지기 작성일03-09-09 09:20 조회1,670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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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행복한 한가위가 되기를 빕니다.
아침, 집에 전화를 해서 근황을 여쭤보니
올해 농사는 지프락(전라도 사투리로 볏짚) 농사만 지었다는
어머니의 한숨 섞인 답변이 들려옵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집은 괜찮겠지만
농사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온 사람들은
막상 추수를 끝내고 나서 몰려올 허탈감을 어찌 극복할는지
입초부터 우울한 한가위 소식만 들려옵니다.
어렵다 어렵다 해도 산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느냐고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보던 사람들도
조금씩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가는가 싶습니다.
자연 재해 앞에 어쩔 수 없이 왜소해지는 인간의 모습은
과학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을 보니
사람은 아무리 해도 사람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아침마다
가까이 모시지 못하는 불효 때문에
아버님의 근황을 전화로만 묻습니다.
지난 달 퇴원하신 뒤 집에서 가료중인 아버님은
그새 몸이 많이 좋아지셔서
삼일 걸러 다니던 병원을
이제 한달에 한번 정도만 다니시면 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가볍게 집 주위를 산책도 하실 정도로 회복되어
지난 주말에는 예솔지기랑 같이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셨습니다.
지난번 제 글에 꼬리글을 달아주신 분들과
전화로, 메일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원으로
제 아버님의 쾌유를 빌어주신 모든 분들게
삼가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옆구리에 박아두었던 호스를 빼고
링겔 주사도 졸업하는 날
그날은 제가 아버님과 같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 기념으로
다소 힘들어하시는 아버님과 병원 산책을 나섰습니다.
행여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아버님의 손을 꼭 잡고요.
얼마 만에 잡아보는 아버님의 손인지
물때가 끼어있는 손톱이 그대로 보이고
언젠가, 그 언젠가
손톱째 뭉툭 잘려나간 손가락 하나가 애처롭습니다.
만나면 같이 식사나 하고
짧게 짧게 스쳐가는 몇마디로 만남을 대신하거나
제 차를 타시더라도 뒷자리에 앉아만 계셔서
속깊은 이야기 한번 나눠본 적이 언제인가 싶습니다.
이렇게 부자간에 손잡고 걸어보는 것도
난생 처음이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예 이런 기회를 마련해볼 생각도
아버님의 손을 잡아볼 생각조차도 못하고 살아온
제 어리숙한 지난 날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읽은 글귀 하나가 새롭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얼마 없다"
천년 만년 같이 살 것 처럼
우리가 사는 세월이 유한하다는 것을
우린 얼마나 잊고 살아가는지요.
그러면서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고 철썩같이 믿었다가
발등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요.
제가 생각해봐도
바쁜 일에 쫓겨 부모님과 같이 한지붕 아래 잠드는 것도
일년에 고작 며칠에 지나지 않고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고작 몇 끼니인데
그것도 불과 한시간 남짓한 거리에 부모님을 모시고서도
겨우 이것 뿐이었으니
이번 병원 생활은 제가 분가를 하고 나서
일년을 통털어 가장 오래 아버님 곁을 지킨
어찌 보면 축복의 날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남은 날들을 헤아려 보게 되었고
아버님의 손을 잡고 같이 걸어보았고
그분이 아파할 때 같이 아픔을 나누지는 못할 망정
곁에서 그 고통을 지켜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제 마음의 빚이 어느 정도 줄어든 기분입니다.
하여 정신없이 일이 바쁜 동생들도 불러들여
아버님과 같이 밤을 보내게 했었습니다.
문제는 일이나 돈이 아니라
아버님 돌아가신 다음이라도
가슴속에 한줌 한이라도 남지 않도록요.
사랑할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번 한가위는
이런 가족간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시고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부모님과 같이 손이라도 잡고
회원님들의 태가 묻힌 땅을 한바퀴 돌아보세요.
거기에 옛날 어렵게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대 흉작으로 힘들고 어려운 한가위지만
누가 그랬던가요?
추억이 힘이 된다고요.
그런 힘을 얻어 다시 생활 전선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보름달같은 한가위가 되기를 빕니다.
예솔지기 드림
추신: 예솔지기는 지난 주말 부모님과 함께 서울 동생네 돌잔치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추석에도 변함없이 예솔에 있습니다.
댓글목록
장은태님의 댓글
장은태 작성일
아버님께서 차도가 많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근데 이제 설 오셔도 연락도 없이 걍 댕겨가시는군요.
울 예경회에 대한 애정이 식으셨군요.^^
암튼 즐거운 추석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예솔지기님의 댓글
예솔지기 작성일무신 소리... 여기에서 토요일 학교 끝나고 출발해서 이튿날 새벽 6시 반에 다시 예솔로 왔답니다. 아시자나요. 예솔을 비울 수 없다는 거. 특히 주말에는....
장은태님의 댓글
장은태 작성일
그럼 그렇지...^^, 근데 그런 일정으로 다녀 가시는게 가능이나 합니까? 대단하십니다.
추석연휴는 잘 보내셨겠지요? 태풍피해는 없으시다구요? 다행입니다.